오만
박지민 X 전정국
ⓒIno
지민은 늘 정국을 예쁘다 했다. 예쁘다, 우리 정국이. 잘한다. 그렇지. 정국에게는 화내는 모습을 한 번도 보인 적이 없었고 정국의 앞에서 늘상 생글생글 웃어댔다. 정국이 초등학교 2학년 운동회 때 넘어져 꼴찌를 하고는 엉엉 울면서 안겨왔을 때에도 얼굴에 범벅이 된 눈물콧물을 닦아 주며 괜찮다고, 잘했다고 말했으며, 더 어릴 때에는 길을 걷다 정국이 다리가 아프다 말하면 힘든 기색도 없이 기꺼이 업어 주었다. 자기도 마찬가지로 작았고 지쳐 있었을 텐데 말이다. 그렇다고 정국이 지민에게 특별히 고마움을 느꼈냐 하면 그건 또 아니다. 정국은 그것이 당연한 줄 알았다. 평생을 그렇게 살아 왔던 것이다. 박지민은 전정국에게 뭐였지. 글쎄, 아마도 자신의 왼쪽 새끼손가락 정도, 의 존재감을 가진 사람이었을 것이다.

Ready, Get Set, Go!
“여긴 지민이 형. 어릴 때부터 친하던 형이야. 형, 이쪽은 내 남자친구.”
“아, 안녕하세요. 얘기 많이 들었어요.”
“반갑습니다.”
빙긋 웃는, 정국의 남자친구라는 작자는 키가 정국보다 조금 더 컸는데, 넓은 어깨 때문에 체구는 훨씬 커 보이는 사내였다. 잘생겼네. 그냥 잘생긴 게 아니라 아주 잘생겼다. 그래, 끼리끼리, 잘생긴 애는 잘생긴 애하고 만나는 거지. 보기 좋네. 지민은 불편한 기색을 감추고 애써 웃었다.
제 앞에서 남자친구라 소개한 사람의 팔짱을 끼고 실실거리며 웃는 정국은, 지민의 엄마의 친구의 아들이자 두 사람 모두 기억하지 못할 만큼 어릴 때부터 자주 만나 같이 놀던 동생이었다. 남자친구가 생겼으면 얌전히 둘이 깨 떨어지게 사귈 것이지 굳이 지민에게 데려와 보이는 이유가 뭐냐, 하고 묻는다면 아마 두 사람 다, 지민이 정국을 좋아해서라고 답할 것이다. 누구도 먼저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지만 둘 다 알고 있었다. 지민은 정국을 -그러니까, 그렇고 그런 의미로- 좋아했고, 정국은 부러 그런 지민에게 못되게 굴었다. 즉, 이렇게 애인을 소개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처음은 중학교 삼학년 때로 기억한다. 지민이 정국의 문자를 받고 잠깐 집 앞 놀이터로 나가자, 그곳에는 키가 정국의 어깨 정도 오는 귀엽게 생긴 여자애가 정국의 팔짱을 끼고 정국에게 바싹 달라붙어 있었다. 여소 시켜주려는 건가? 아니, 그렇다기엔 저 둘이...... 너무.
“형, 인사해. 여기 내 여친. 서영아, 지민이 형이야.”
여자애는 여전히 정국에게 고목나무에 붙은 매미마냥 딱 들러붙어서는 고개만 조금 숙여 인사했다. 지민은 정국의 연애 사업까지 일일이 알고 싶지는 않았기에 지금 이게 무슨 영문인지 몰라 어리둥절했지만, 일단은 눈을 반으로 접어 씩 웃고는 인사했다. 그리고 정국에게 이런 행동을 하는 이유를 굳이 캐묻지 않았다.
정국은 사귀는 사람과 오래 가지 못했다. 길어 봤자 백일. 짧으면 일주일. 지민에게 소개한 다음날이나 다다음날 헤어지는 경우도 허다했다. 정국이 자신의 애인을 소개해주는 이유를 지민이 어렴풋이 알게 된 건, 정국이 네 번째 애인으로 남자를 데려왔을 때였다. 처음 사귀었던 그 귀여운 여자애랑 헤어진 지 일 년 정도 되었을 즈음이었다. 정국은 지민이 남자를 좋아하는 걸 알고 있었다. 자기가 그 여자애라도 되는 양 저보다 키가 큰, 어른 같아 보이는 남자에게 딱 붙어 자신에게 인사하는 정국을 보고, 지민은 속으로 울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얘 지금 나 보라고 이러는 거구나. 내가 자기 좋아하는 걸 알고 있구나.
‘형은 내가 여자친구 사귀는 거 봐도 아무렇지도 않아?’
‘......응? 내가 그걸 보고 어떤 마음이 들어야 해?’
태연하게 대답했지만 사실은 조금 뜨끔했던 대화. 어딘가 찝찝했지만 무엇인지 몰라 그냥 넘겼는데, 얘는 알고 있었던 거구나. 내가 자기 좋아하는 거 알아서, 나 질투나라고. 나 괴롭히는 거구나 얘는.
그날 지민은 집에 가서 조금 울었다. 짝사랑에 익숙해질 때도 되었건만, 이 건방지고 영악한 아이는 어려서도 지금에서도 자기를 이기려 들었다. 머리 꼭대기에 올라와서 자기 멋대로 하려 들었다. 지민은 자기가 정국을 좋아하는 한 어쩔 도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열병 비슷한 건데, 약도 없었다.
*
사실, 정국도 처음에는 자신이 왜 그러는지 알지 못했다. 처음 사귀었던 애-지금은 이름도 기억 못하는데, 서연이었나 서영이었나-를 소개할 때, 생각보다 멀쩡한 지민의 표정에 속이 조금 끓기는 했다. 그때는 그게 무슨 감정인지 잘 몰랐다. 세 번쯤 마음에도 없는 여자친구를 사귀고 지민에게 소개하기를 반복했을 때 알았다. 나는 이 형을 괴롭히고 싶은 거구나. 당황해서 일그러진 형의 표정을 보고 싶은 거구나. 자기가 좋아 죽겠다는 지민의 표정을 보면 마음속에서 슬그머니 고개를 들던 가학심을 정국은 그제야 깨달았다.
사실 두 사람의 관계에서 정국이 한 일은 거의 없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정국이 울고 있으면 먼저 달려온 건 지민이었고, 반대로 웃고 있어도 가장 먼저 함께 웃어준 게 지민이었다. 대학에 합격하고 부득불 우겨 정국의 학교 바로 앞에 둘이 같이 살 자취방을 잡은 것도 지민이었고 -그 자취방은 지민의 학교에서는 사십 분 거리였다- 정국이 술에 취하면 항상 업어다 집으로 데려온 것도 지민이었다. 정국의 시간표를 꿰고 있었고, 아침에 강의가 있는 날이면 정국을 깨워서는 감기는 눈 아래 벌어진 입에 빵 조각을 물려 줬다.
그러니까 애가 버릇이 나빠졌지. 옆에서 지켜본 지민의 친구이자 정국의 아는 형 태형이 말한 바로는 그렇다. 정확히는, 정국은 지민에게만 버릇이 나빴다. 군대에서는 할 것 다 하다가도 결혼만 하면 집구석에서 늘어져 있는 가부장적 남편의 모습과 비슷하달까. 나름 반장도 하고 친구들 사이에서 인기도 있는 애인데, 지민의 앞에서만 어린애처럼 구는 모습이 태형은 퍽 이상했다. 물론 정국은 그것이 이상함을 몰랐다. 지민은 애초에 그것이 이상하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오늘따라 술 왜 이렇게 많이 마셨어.”
“으응, 오늘 왕게임을 오래 하드라구. 내가 걔네랑 뽀뽀를 할 수는 없지 않냐아. 그치 정국아.”
“그냥 뽀뽀 한 번 하고 말지.”
지민이 정국에게 업힌 채 늘어졌다. 정국의 손은 지민의 엉덩이를 받치고 있었다. 정국은 지민의 앞에서 좀 버릇이 없다 뿐이지 인지상정을 모르는 천하의 망나니는 아니었기에, 종종 많이 취해서 몸을 제대로 못 가눌 정도가 된 지민을 데리러 가고는 했다. -물론 지민이 취한 정국을 데리러 가는 횟수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술에 취하면 지민은 더 솔직해졌고, 정국의 앞에서는 드물게 애 같은 모습을 보였다.
“국아.”
“왜.”
“국아아.”
뭘 또 뜸을 들여. 무슨 중요한 말을 하겠다고. 취해가지고는. 죽죽 늘어지는 말꼬리로.
“내가 걔네랑 뭘 어떻게 해애. 내가 너르을 좋아하는데에. 국아아. 너두 내가 너 좋아하는 거 알고 있었지이.”
정국이 흠칫, 했다. 중요한 말이네. 아주 중요한 말이네. 지민은 유치원 때 정국에게 “사랑해”라 쓰인 생일 축하 편지를 준 이후로, 정국에게 사랑한다거나 좋아한다 말한 적이 없었다. 말짱한 정신으로는 그 비슷한 말도 차마 하지 못해서 예쁘다고만 주구장창 외쳐댔다. 물론 정국은 지민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둘 중 누군가가 입 밖으로 낸다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뱉은 말은 어느 정도의 힘을 가지기 마련이다. 정국이 지민을 다시 고쳐업고는 태연스레 대답했다. 당황스러운 마음과 언젠가 이럴 줄 알았지, 하는 마음이 반반.
“알지.”
“......나두, 네가 아는 거 알고 있었어.”
그러고는 말이 없는데, 정국은 한참을 묵묵히 걸어가다 집 근처에 와서야 뒤를 슬쩍 쳐다보았다. 지민은 잠들어 있었다.
*
놀랍게도 다음 날 지민은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했다. 일어나서, 정국을 깨웠고,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정국에게 왜 그러냐 물었고, 정국은 어리둥절해서 아무 것도 아니라 했다. 정국이 아는 바로는 지민이 술에 취해 필름이 끊긴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어제 유난히 술을 많이 마셔서 그런가. 아니면 나도 이 년 더 지나면 저렇게 감쪽같이 연기할 수 있게 되는 건가. 고민하던 정국은, 지민이 머리는 산발을 한 채 자신을 보고 씨익 웃자, 아무래도 전자인 것 같다고 판단했다.
그로부터 일주일 간은 평소처럼 얌전했다. 나중에 와서 돌이켜 생각해 보면 폭풍 전야의 고요함 같은 느낌이겠으나, 어쨌든 지민은 정국을 좋아했고 그러므로 정국에게 잘 해 주었고, 정국은 지민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았고 그래서 지민이 자신에게 잘 해 주는 것을 아주 당연하게 여겼다. 즉, 다른 때와 정확히 똑같은 나날들이었다. 정국은 그때의 일을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어차피, 어쨌든 간에, 지민은 자신을 좋아하니까.
문제는, 지민이 취해 고백한 날로부터 일주일 하고도 하루가 더 지난, 두 사람이 자취방 바닥에 누워 뒹굴거리던 토요일에 일어났다.
*
“국아, 아무래도 형이 생각을 좀 해봤는데 말이야.”
“뭐.”
정국이 별 생각 없이 누워 있던 자리에서 일어나 앉으며 대답했다. 지민은 퍽 진지한 눈을 하고 핸드폰도 내려놓은 채 바닥에 앉아 있었다.
“그날. 나 술 취했던 날.”
“.......”
“내가, 너한테 고백했던 날.”
아. 정국은 입을 벌린 채 눈만 끔뻑끔뻑했다. 지민이 기억하고 있을 줄은. 그 와중에도 드는 생각은, 연기 참 잘하네, 였다.
“내가, 너를 좋아한다고 했잖아.”
“응.”
“그니까, 나는 지금 술 취하지 않은 채로, 맨정신으로 너한테 다시 고백하는 거야. 좋아한다고.”
정국은 멍청하게, 또다시 아, 하고 중얼거렸다. 아. 그런데? 내가 여기서 뭐라고 해야 하지? 둘 사이에 얼마간 정적이 흘렀다. 둘 중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눈을 맞추지도 않았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 정국은 그대로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고 나가 버렸다. 말하자면 회피였다. 그냥 나는 아니라고 말하면 될 것을, 왜 그렇게 나가 버렸냐 하면 정국의 이기심과 오만에서 비롯되었다 말해야겠다. 정국은, 솔직히 말해, 지민이 저로 인해 애타하는 모습이 재미있었다. 조금 지나고 정국이 들어왔을 때, 지민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고 둘 중 누구도 지민의 고백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
세 번째 고백은 바로 다음 날, 늦은 밤 시간에 행해졌다.
“정국아.”
어쩐지 목소리를 깔고 답지 않게 표정을 굳힌 게 심상치 않더라니.
“잠깐 얘기 좀 하자.”
정국이 얌전히 엉덩이를 끌고 지민의 앞으로 다가가자, 지민이 가장 먼저 꺼낸 말은 대답해 줘, 였다.
“뭐가, 갑자기?”
“어제. 내가 고백했잖아. 너는 자리를 피했고.”
“.......”
“다시 말할게. 세 번째야. 나 너 좋아해. 동생으로서 말고, 그렇고 그런 의미로. 사랑해.”
정국은 눈을 내리깔았다. 난감한 상황.
“너는 나를 좋아해? 그런, 의미로. 아니라고 말하면...... 나는 네 옆에 계속 있을 자신이 없다.”
지민도 알고 있었다. 정국은 자신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물어본 것은, 아주 아주 작은 가능성이라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짝사랑을 오래 하다 보면 썩은 동아줄인 것을 알면서도 붙들고 매달려 보게 된다.
정국은 자신이 어제처럼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어떻게든 대답해야 할 것이다. 사실 대답을 어떻게 하든 무슨 상관일까 싶었다. 곁에 있을 자신이 없다고 지민이 제 입으로 말했지만, 정국은 그 말을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여태껏 그래왔듯, 지민은 어차피 자신의 곁에 있을 것이라고, 건방지고 뻔뻔스럽게도 정국은 생각했다. 정확히 말해, 정국은 지민이 제 곁에 없다는 것이 말도 안 된다 생각했다.
“어떨 것 같아. 내가 형을 좋아할 것 같아?”
피식 웃으며 물은 정국은, 까닭 없이 건방져서, 늘 지민을 갖고 놀려 들었다. 지민이 그것을 모를 리 없었다.
“......아니.”
“응, 맞아. 아니.”
마지막까지 못됐구나, 너. 지민은 흐리게 웃었다. 여태껏 꾹꾹 눌러 스스로에게마저 숨겨온 상처가 한꺼번에 둑 터지듯 쓰라려왔다. 전부터 그랬지, 너는. 꼭 애인을 사귀면 나한테 보여준다고 데려왔고. 나 없이는 아무것도 못하는 척, 내가 늘 곁을 맴돌게 만들었고. 지민은 아랫입술을 꾹 문 채 이불을 깔았고, 먼저 자리에 누웠다. 그리고 정국이 다음 날 열한 시가 다 되어 일어났을 때,
정국의 왼쪽에 누워있어야 할 지민은 보이지 않았다.
몸만 없는 게 아니었다. 핸드폰도, 어젯밤까지 의자에 걸려 있던 겉옷도, 신발도, 카드도. 옷장을 확인해 보니, 옷 몇 벌도 사라진 것 같았다. 어제, 고백을 거절한다면 더 이상 정국의 옆에 있지 않겠다는 지민의 선언은 진짜였다. 정국은 서둘러 지민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당연하게도 지민은 받지 않았다. 못 받은 것도 아니고, 삼십 초도 채 되기 전에 그냥, 뚝 끊어 버렸다. 정국은 순간 어처구니가 없었다. 분명 정국이 어이없어해야 할 상황은 아니다. 지민은 어제 분명 예고했고, 그것을 가벼이 여긴 것은 정국이었다.
처음에는 에이, 설마, 했다. 설마 이 형이 나를 두고 가 버리겠어? 늘 나한테 져 주기만 했던 형이? 그러나 일곱 번째 건 전화에서 전화가 꺼져 있다는 안내음이 들리자, 정국은 슬슬 현실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화가 났지만-정국은 지민의 자리는 자신의 옆, 혹은 뒤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보란 듯이 잘 살려 했다.
형이 없어도 나는 멀쩡히 산다, 하는 마음이었다. 정국은 나름 혼자 아침에도 잘 일어나고, 밥도 잘 해 먹고, 일부러 페이스북에 사진도 많이 찍어 올렸다. 왜? 지민이 저를 버리고 간 제 보호자라도 되나? 자신을 차고 매정하게 떠나간 구남친이라도 되나? 정국이 지민에게, 너 없이도 잘 산다, 하는 것을 어필해야 할 이유는 없었다. 그러나 일종의 치기에, 정국은 아무렇지도 않게, 오히려 더 잘 사는 척 행동했다. 삐걱거린다는 생각이 든 것은 그러나, 일주일도 채 가지 않아서였다.
분명 문제가 없는데, 표면적으로 전혀 이상한 게 없는데 마음이 자꾸 뒤숭숭했다. 당연하지. 내내 보던 형이 없으니까. 그즈음부터 지민은 정국에게 왼손 새끼손가락 이상의 존재감을 가지기 시작했고, 정국은, 과연 이 사람은 나에게 뭐였나, 하는 생각을 태어나서 처음으로, 진지하게 해 보기 시작했다.
박지민은 나를 좋아한다. 박지민은 나한테 예쁘다고 한다. 아니 이런 거 말고. 나는 이 형을 어떻게 생각하지.
나한테 맨날 다정한 사람. 만만한 사람? 내가 뭘 해도 다 잘했다고 해줄 것 같은 사람. 그러고 보니, 없으면 안 될 것 같은 사람. 하루라도 못 보면 답답하고. 만만해서 자꾸 놀리고 싶고.
종이에 생각을 주욱 적어내려가던 정국이 펜을 집어던진 건 그때였다.
좋아해?
좋아해?
내가? 박지민을?
생각해 보면 초딩 수준의 행동들이었다. 질투하라고, 그렇게 뜨겁게 사랑하지도 않았던 애인들을 부러 소개시켜 줬고, 당황을 애써 숨기려는 표정을 보면 재미있으면서도 가슴 한구석이 어지러웠다. 술을 취할 때까지 마시고, 챙겨주지 않으면 꼭 일을 제대로 하지 못했던-않았던- 것도, 나 좀 봐 달라는 유치한 땡깡이었는지도 모른다. 정국은 머리가 핑 어지러웠다.
내가 박지민을 좋아한다, 하는 것을 정국이 제대로 받아들이고 적응하기까지는 만으로 하루 정도가 걸렸다. 거부, 분노, 협상, 우울, 수용의 다섯 단계를 빠르게 거쳐 정국은, 이내 체념하듯 인정했다. 나는, 박지민을, 좋아한다. 쓸데없었다. 이제 와서. 무슨 소용이야.
정국은 지민을 찾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지민이 어디 있는지 찾기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정국에게 너무 많은 감정을 소비해서일지는 몰라도, 지민의 인간관계는 좁은 편이었다. 정국이 알 만큼 친한 친구는 딱 한 명. 태형이었다. 지민은 아마도 태형의 자취방에 있을 터였다. 정국은 그 위치를 알고 있었다.
태형에게 전화해 확인하지는 않았다. 지민이 달리 있을 곳도 없다 생각했고, 어차피 지민이 입막음해놓았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자취방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탈탈거리는 버스를 타고 가며 정국은 생각했다. 아마도 지민은 저를 여즉 좋아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제가 좋다고 말하면, 금방 지민의 화는 풀릴 것이다. 입을 맞추면 당장에라도 웃어 줄지도 모른다. 정국은 양 주먹을 한 번 쥐었다 폈다.
*
‘띵-동’
정국이 초인종을 길게 눌렀다. 지민은 지금 시간에 공강이니, 여기 있는 것이 맞다면 지금 이 문 뒤, 방 안에서 핸드폰을 하고 있을 터였다. 철컥 소리와 함께 문을 연 것은 태형이었다. 네가 왜 여기에, 아, 박지민 때문에 왔구나. 태형의 표정이 읽혔다.
“안녕하세요.”
“일단 들어와. 지민이 안에 있어.”
태형의 뒤에는 지민이 서 있었다. 지민을 본 순간 시큰해진 코는, 추워서 그랬다 치자. 지민이 태형에게 눈짓을 했고 태형이 문을 닫고 밖으로 나갔다. 정국은 다시 지민을 보았다는 안도감에, 달리 무슨 생각을 할 여유도 없이 지민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자기보다 키가 작은 지민의 양 볼을 잡고 다짜고짜 입을 맞추었다.
입맞춤이라기 보단, 그냥 입술을 맞대고 있었다 말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둘 다 눈을 번뜩 뜬 채였다. 지민의 눈동자는 검었고 망연했고 아득했다. 바싹 말라 있었는데, 점차 울음이 고이는 것이 보였다. 정국은 뜻을 알 수 없는 눈을 하고 있었다. 오 초 가량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입술을 맞대고 있다가, 지민이 힘껏 정국을 밀어냈다.
“뭐 하는 거야. 장난해, 지금?”
“.......”
정국은 일순 당황했다. 형은 나를 좋아하고, 나는 형에게 입 맞췄고, 그럼 형은 좋아해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단순한 사고의 흐름 때문이었다. 자신이 좋아한다 말하면 언제든 지민은 화를 풀고 집으로 돌아올 줄 알았다. 무언가 엇나갔다. 자신이 잘못 생각했다는 걸 정국은 순간 느꼈다. 정국은 그렇게 화난 표정의 지민을 본 적이 없었다.
“나가. 당장.”
지민의 눈에서 뚝, 하고 눈물이 떨어지는 것을 본 정국은 순간 사고회로가 정지되는 듯한 기분이었다. 지민은 정국의 앞에서 화를 낸 적도, 운 적도 없었다. 이건, 그냥 틀린 정도가 아니라 크게 잘못된 거구나. 어느 지점에서 무엇이 엇나간 건지 정국은 알 수 없었다.
“형. ......내가 형을 좋아하는 것 같단 말이야......!”
지민은 벌건 눈으로 정국을 쳐다봤고, 정국은 신발을 꿰차고 급히 밖으로 나왔다.
어쩌라는 거야. 이제 와서. 지민은 정국이 가고 나서 많이 울었다.
정국은 다시 덜컹거리는 버스를 타고 자신이 사는 자취방으로 향하며 가만히-사실 한 번도 상상치도 못했던 지민의 울음 탓에 생각을 정리하기가 어려웠지만- 생각했다.
형이 나한테 자기 여자친구나 남자친구를 데리고 와 태연히 소개시켜줬다면. 가정만으로도 정국은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그걸 보고 어이없어하는 저를 보고 속으로 재미있어했다면. 고백했을 때 가지고 놀려고 들고, 다짜고짜 찾아와서는 맥락 없이 입 맞추었다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정국은 자신의 행동이 얼마나 잘못되었는가를 그제야 깨달았다.
그러고 나니 이제 서서히 윤곽이 잡혔다. 순서가 틀렸다. 정국은 우선 사과하고 보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먼저 미안하다 해야겠다.
내일, 아침, 지민을 만나야겠다.
*
지민은 꽤 오래를 울다가 자리에 누워 복잡한 기분을 차근차근 정리해 보았다. 처음에는 정국이 자신을 놀리려는 줄 알았다. 굳이 찾아와서까지 저를 괴롭힐 아이는 아니라는 것을 알았지만, 순간 드는 생각은 그것밖에 없었다. 제 고백을 거절하고 며칠 있다 찾아와서는 다짜고짜 입술부터 갖다대고. 지민은 정국에게 화가 났고 그 와중에 설레 하는, 자신에게 또한 화가 났다.
그래, 그래서 정국에게 화를 냈다. 이제 아무 사이도 아닌데, 화 좀 내면 안 되나? 아니, 설령 무슨 사이라 하더라도 충분히 화낼 수 있는 일이었다. 버럭 소리를 지른 다음 잠시 후회하긴 했지만, 어쩌라고, 속으로 뇌까리며 그 생각을 덮었다. 입술이 닿았던 느낌이 아직 생생한 탓에 눈물은 계속 차올랐다. 정국의 입술은 생각보다 거칠었다. 얘는, 얘는, 나 없이도 잘 지내는 척 하더니. 페북에 올라오는 글은 계속 보고 있었다. 지금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조차 지민은 잘 알 수 없었다. 정국이 미운지 좋은지도. 그리고 눈에서 눈물이 툭 떨어졌다.
정국이 그렇게 당황한 것을 지민은 거의 처음 보았다. 하얘진 얼굴로 더듬대다가, 말했다.
저를 좋아하는 것 같다고.
대체 어떤 계기로 정국이 그렇게 생각하게 된 건지 지민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 지민이 믿었던 것은, 이렇게 굳이 찾아와 말할 정도라면 적어도 거짓말은 아닐 거라는 것.
정국이 바들대며 나간 후 지민은 생각했다. 물론 정국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그 사실은 기뻤다. 그렇지만 그걸 표현하는 방법은 많이 서툴렀다고, 옳지 않았다고, 지민은 생각했다. 무지는 때로 가장 흉악한 폭력이 되기 마련이다. 정국의 얕은 속내가 훤히 읽혔다. 이렇게 와서 느닷없이 입 맞추면 제가 기뻐하리라 생각했겠지. 이 바보 같은 아이가 저를 얼마나 호구로 본 건가, 하는 생각이 들어 맥이 탁 풀렸다. 좋고, 밉고, 설레고, 싫고, 지민은 입술을 만지작거리다 손끝을 세게 깨물었다. 그럼에도 잇새로 울음이 비져나왔다.
그때부터 한 시간 정도를 울다가, 찬물로 뜨거운 얼굴을 씻고 자리에 누운 게 지금이었다.
울었던 것이 딱히 정국이 오늘따라 특별히 미워서는 아니었다. 오히려 욺으로서 그동안 꾹꾹 눌러 쌓아왔던 애증 섞인 복잡한 감정이 어느 정도 씻겨나갔다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정국이 안쓰럽기도 했다. 표면적으로는 제가 잃은 것이 더 많아 보일지 몰라도, 어쩌면 정국이 저보다 더 많은 것을 잃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지민은 처음으로 했다. 한 발짝 떨어져 지켜보았다면 관계는 이렇게 비정상적인 위기로 치닫지 않았을 것이다. 지민은 정국의 오만에 자신도 상당 부분 일조하였음을 그제서야 깨달았다.
머릿속이 정돈되자 무엇을 해야 할지가 뚜렷해졌다. 정국은 자신을 좋아한다 했고, 저 역시 정국을 좋아한다.
이제 슬슬 돌아갈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
하늘이 맑았다. 아침 아홉 시 즈음, 지민은 전화벨 소리에 눈을 떴다. 지민의 강의는 전부 오후에 있었기에 정국 때문이 아니라면 그가 굳이 아침에 일어날 필요는 없었다. 그래서 지민은 태형의 집으로 온 후로 줄곧 늦잠을 잤다. 태형은 자살하자를 중얼거리며 강의를 들으러 가고 없었다.
전화를 건 사람은 정국이었다. 지민은 어제 일이 저뿐만이 아니라 정국에게도 큰 충격이었으리라는 걸 알았다. 둘의 관계에 있어 아마도 가장 커다란 전환점이리라는 것 역시도 알고 있었다. 오늘도 다짜고짜 전화로 고백해오지는 않을 것 같고, 그럼 뭐지. 지민은 정국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일단은 전화를 받았다. 목이 잠겨 목소리가 살짝 갈라졌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아 형. 방금 일어났어?"
"응. 왜."
"아....... 혹시 잠깐 앞으로 나올 수 있어?“
설마 이 앞으로 찾아온 건가. 늘 지민이 정국을 -우산이나 숙제 등 여타 잡다한 이유로- 찾아갔지, 정국이 지민을 일부러 찾아온 것은, 지민이 걸을 수 없을 정도로 취했을 때 말고는 아마도 처음일 것이다.
지민이 대충 세수를 하고 겉옷을 걸치고 나가자, 문 앞에는 조금 어두운 표정의 정국이 안절부절못하며 서 있었다. 얘는 대체 무슨 얘기를 하려고 이렇게 분위기를 잡나. 지민은 의식적으로 표정을 굳혔다. 지금 상황을 보아하니 제가 말하자면 갑이 된 모양인데, 이참에 나도 좀 놀려 보자, 하는 마음에서였다.
"왜."
"......내가 형 마음 너무 가볍게 생각했어. 형이 나한테 맨날 웃어주니까 우스운 사람인 줄 알았어. 잘해주니까 만만한 줄 알았어."
정국은 주루룩 말을 쏟아냈다.
"그래서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그냥, 사과하려고. 미안했다고."
지민은 아이를 더 놀리고 싶었다. 네가 내게 애인을 보여줬던 게 이런 마음이었을까. 제 앞에서 보기 드물에 의기소침해 있는 정국의 모습에 웃음이 터지려는 걸 꾹 참았다.
"그래서, 내가 그 사과를 받아 줘야 해?"
"......."
정국은 지민과 눈을 제대로 못 맞추고 손만 꼼질대고 있었다. 고개를 바짝 숙여 표정은 잘 보이지 않았다. 움츠린 어깨가 조금 안쓰러웠다. 기고만장했던 아이가 제 앞에서 풀이 잔뜩 죽어 있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묘했다.
정국이 고개를 조금 들었고, 지민은 뽀얀 양 볼이 젖어든 것을 보았다. 가슴이 철렁했다. 정국의 고개를 두 손으로 받쳐 들었다.
정국이 울고 있었다. 큰 눈에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자존심이 세서, 특히 지민의 앞에서는 그 자존심이 배가 되어서, 유치원 이후로 지민의 앞에서 운 횟수를 한 손에 꼽을 정도인, 그 아이가.
지민은 당황한 채 정국의 앞으로 걸어갔다. 눈높이가 비슷했다. 맨날 올려다봤었는데, 또 어릴 때 생각나고 그러네.
두 손으로 볼을 누르자 입술이 튀어나왔다. 정국은 울어도 예뻤고 못생겨도 예뻤다. 지민이 푸시식 웃자 정국은 울다 말고 이게 무슨 상황이냐는 표정을 지었다. 지민의 화는 눈 녹듯 사라진 지 오래였다.
지민이 정국에게로 더 가까이 다가가서,
다가가서,
입을 맞추었다. 혀를 섞었다.
*
"너는 내가 좋은 것 같다 했지."
정국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도 눈동자가 커다래져 있었다.
"나는 벌써 네가 좋다고 세 번이나 말했어. 그럼 이제 우리가 뭘 하면 될까."
정국은 눈만 끔뻑이고 답이 없다.
"사귀자."
사귀자고, 이 귀여운 응석받이야.
"......."
짧게 숨을 들이쉰 정국이, 응, 하고는 지민의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지민은 다시 둘의 자취방에 짐을 옮겼다. 아침이면 둘의 알람 소리가 나란히 울린다. 지민이 저녁을 하려 하면 정국이 저도 돕겠답시고 당근이며 양파를 삐뚤빼뚤 썬다.
정국은 더 이상 자신의 애인들을 지민에게 소개시켜주지 않는다. 별이 뜨는 밤이면 둘은 나란히 이불을 깔고 눕는다.
"형. 사랑해."
지민은 가끔 웃으며 장난을 친다.
"......어떨 것 같아. 내가 너를 사랑할 것 같아?"
당연하지! 아, 형, 근데 진짜 그 얘기 하지 말라니깐! 정국이 지민을 퍽퍽 쳐대면, 지민은 앞은 보이나 싶게 활짝 웃으며 다시 말한다.
"응, 맞아. 당연하지."
정국에게 쪽, 입맞추고는,
"사랑해."
대답하는 지민의 얼굴 위로 달빛이 비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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